2011/02/23 11:32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 - 양지현 100권읽기 (2011)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



양지현

(2011. 8)




고등학교 산악 동아리 동창들의 산행이 있은 다음 날, 일행 중 두 명이 죽는다. 한 명은 자신의 집에서 목이 졸려서 다른 한 명은 회사 사무실에서 청산가리를 먹은 채. 강도살인과 자살 별개의 건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는 경찰. 하지만 역시나 이들과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 1년 후배인 형사 창모는 과거 선배들에 대한 기억과 수상한 정황들을 통해 두 건이 동일인물에 의한 계획살인이라 판단하고 유력한 용의자이자 삭악 동아리 회원 박종혁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비슷한 시간 서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벌어진 살인, 학생시절 기억을 공유한 동아리, 그리고 과거 그들의 학창시절의 이면에 숨은 비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밝혀지는 범인과 사건의 진상...

요약해 놓으면 그럴듯하다. 거기에 제4회 디지털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란 수식까지 읽기 전부터 잔뜩 기대하게 만드는 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후인 지금 솔직이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일단 가장 크게 불편했던 부분은 '작위성'이다. 쟝르적으로 봤을때 일본의 신본격 추리물에 가까운 소설인데 이런 소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에 여지없이 걸렸다는 느낌이다. 중반까지 긴장감을 조성하고 독자를 속이는 트릭이 그 자체적으로도 그렇고 명탐정 역할인 창모가 범인의 (또는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용의자의) 앞에서 트릭을 밝히는 두 번의 장면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기실 사건수사 담당이 용의자 동아리 후배로도 모자라 과거의 개인적 원한이 있다는 설정도 무시하기 힘들고. 무엇보다 아쉬운 건 이렇게 작위적으로 쌓아올린 트릭이 기실 나름의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위한 트릭이 아니라 트릭을 위한 이야기, 아니 아예 트릭과 이야기가 겉도는 느낌이다. 범인은 왜 그런 트릭을 만들었을까? 작품의 주제나 구조를 생각한다면 거기에 개인적이던 사회적이던 수긍할 만한 이유와 메시지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그래야만 했던 극적 당위성을 부여하던지. 하지만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도 그런 트릭을 사용한 이유는 단지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정도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조금 더 관대하게 본다면 또 다른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공범의 정체와 그의 마지막을 생각한다면 그 점도 쉽게 수긍할 수 없다. 결국 트릭과 구조에 캐릭터와 이야기가 전복되어 버린 것이다.

병원에 누운 하선생의 정체와 그 이면의 이야기는 반대로 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파적이긴 하지만 거기엔 인물의 개성과 감정이 녹아있다. 범인이 왜 살인이란 방법으로 복수를 택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별로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의 연줄이 손쉽게 이용되는 점이 또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까지 불평하는 건 너무 깐깐할 수 있고 작가의 운신의 폭을 지나치게 좁히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만화가 강풀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자신은 무대와 캐릭터를 창조할 뿐이고 어느 순간 자신이 만든 캐릭터 스스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고 했다. 좋은 이야기는 굳이 설명을 가져다 붙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캐릭터의 힘이고 서사의 힘이다. 구성이 부실하거나 무리할 수록 작가는 사족을 붙이거나 캐릭터들이 수긍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은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다. 공모전 수상작이란 타이틀이나 장편이라기엔 너무 적은 분량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아직은 젊은 작가의 첫 장편이란 점에서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해본다.



(스포일러)

동아리 회원인 희선은 학창시절 동아리 교사인 하 선생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을 교사에 의한 추행으로 착각한 동아리 남학생 3인은 그들의 관계를 폭로하겠다며 교사를 폭행한다. 결국 옥상에서의 린치 와중에 교사는 추락하게 되고 희선은 그 장면을 목격한다. 마침 하 선생의 아이를 임신중이던 희선은 아버지가 병원 원장인 친구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중절수술을 받고 추락으로 식물인간이 된 하선생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그리고 현재, 범인인 3인의 남학생 중 두 명이 산행 이후에 살해된다. 범인은 바로 희선. 한 명은 약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구한 청산가리를 감기약으로 속여 먹도록 해서 죽인 것이고 그의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이용해 같은 시간 다른 한명의 집에 몰래 들어가 목을 졸라 죽인 것인데 여기엔 하 선생의 아들이 이용된다. (아버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범인들이란 걸 알려주면서 그 원인이 된 자신과의 이야기만은 빼먹었다고 희선은 고백한다. 하지만 연인의 아들을 그런 목적으로 위험에 내몰았다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다.) 결국 창모에 의해 진상이 밝혀지고 희선은 자수한다. 종혁은 누명을 벗고 과거 희선과 하 선생의 관계와 겹치는 학교 학생 소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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